남대문 호떡 먹고 손하트…스틸 주한 美대사 "서울 다시 알아가는 시간이 설레요“

이현석 기자 / 기사승인 : 2026-08-03 10: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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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강조, 정서적 유대감 부각…이번 주 외교 장관 만나 현안 논의…허바드 전 대사의 실패 사례 새겨야

[부자동네타임즈=이현석 기자] 서울 출신인 미셸 스틸 주한 미국 대사가 부임 후 첫 주말인 8월1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을 방문해 시민을 만났다. 31일에는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촬영한 사진을 올리며 “한국의 뛰어난 혁신과 리더십의 유산을 다시금 떠올렸다”고 했다. 한국계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연일 한국 사회와의 정서적 유대감을 부각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스틸 대사는 이날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 찾은 남대문시장에서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고 썼다. 남편인 숀 스틸 변호사와 시장에서 ‘손 하트’ 포즈를 취한 사진도 공개했다.

   

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가 부임 직후 서울 광화문과 남대문시장을 방문하며 찍은 사진을 8월1일 자신의 X에 공개했다. /미셸 스틸 X

 

스틸 대사는 “많은 것이 변했지만 따뜻한 정과 활기, 정겨운 풍경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며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오는 서울을 다시 알아가는 시간이 참 설렌다”고 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도 ‘남대문시장 나들이’ 영상을 올렸다. 환전을 마친 스틸 대사가 호떡을 받아든 뒤 손주가 있다는 상인에게 한국어로 “저도 할머니예요. 손주가 넷”이라고 했다. 대사관은 ‘그랜마(할머니) 동맹 결성’이라는 자막을 달았다. 기념품 가게에선 손주들 선물을 구매한 뒤 상인에게 “장사 잘되길 빌게요”라고 했다.

  

8월1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을 방문한 미셸 스틸(오른쪽) 신임 주한 미국 대사가 남편 숀 스틸 변호사와 함께 손가락으로 작은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한국계 첫 여성 미국 대사인 스틸 대사는 지난달 30일 부임했다. /미셸 스틸 X

 

스틸 대사는 한국 도착 당일인 7월30일에 이어 8월2일에도 영락교회를 방문해 예배를 드렸다. 영락교회는 1945년 북한의 종교 탄압을 피해 내려온 실향민들이 만든 교회로, 실향민인 스틸 대사의 부모가 다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는 별개로 한미(韓美) 간에는 쿠팡 문제와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시행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이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와 의회 일각에는 한국의 정책이 “미국 기업들에 과도한 부담을 부과한다”는 인식도 생겼다. 이와 관련, 스틸 대사는 부임 직전 워싱턴 DC 등지에서 테크 업계 인사와도 두루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스틸 대사는 이르면 이번 주 외교부에 신임장 사본을 제출하면서 조현 외교부 장관과 만나 현안을 협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스틸 대사는 언론 기고에서 “우리 앞에는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으며, 그 도전 과제들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더 많은 관심과 솔직한 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했다.

 

                    스틸 美대사가 새겨야 할 허바드의 실패

효순·미선 사건 후 전국에 반미 시위 확산…법적 책임에만 집중, 민심의 변화 읽지 못해…대선 직전 미군 병사 무죄판결로 여론 폭발…허바드 "한국 문화 제대로 몰랐다"며 후회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가 며칠 전 서울에 부임하면서 1년 6개월 넘게 이어졌던 주한 미국대사 공백 사태가 해소됐다. 이제 ‘한국계 최초의 여성 주한 미국대사’라는 상징성을 가진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스틸 대사는 미국 연방하원의원을 지내며 북한 핵 문제와 한미동맹,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 등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온 인물이다. 남편 숀 스틸 변호사가 미 공화당의 유력 인사로 스틸 부부는 트럼프 대통령과 긴밀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좌파 진영의 반발속에 입국한 미셸 스틸 신임 주한미국대사가 부임 다음날인 7월31일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X(옛 트위터)에 게시했다. 그는 “오늘 세종대왕 동상을 지나며 한국의 뛰어난 혁신과 리더십의 유산을 다시금 떠올렸다. 앞으로의 여정이 기대된다”고 했다. /미셸 스틸 X

 

그런데 한국에서 미국 대사의 성공 여부는 이것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한미 동맹에 반발하는 일부 좌파가 언제든 반미(反美) 감정을 정치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만큼, 한국 사회의 정서를 얼마나 잘 읽고, 예상치 못한 정치적 파고를 넘느냐가 중요하다. 위기 상황에서 내리는 신속한 정치적 판단에 대사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반미 정서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험난한 시기를 보낸 대사를 꼽으라면 단연 토머스 허바드 대사이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도 2008년 좌파가 주도한 미국산 소고기 촛불 집회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허바드 대사만큼은 아니었다.

 

■동아시아 전문가 허바드 대사

 

2001년 7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허바드는 미 국무부의 대표적인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경험 많고 노련한(seasoned) 외교관이었다. 국무부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제를 오래 다뤘고, 필리핀 대사를 거쳐 한국에 부임했다. 제네바 합의에도 관여, 한국 사정도 잘 안다고 평가받았다. 워싱턴에서는 “서울에 가장 적합한 외교관”이라는 기대 속에 부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보수적인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진보 성향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겹친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9·11 테러 이후 이에 대한 ‘복수 전쟁’이 시작됐고, 북한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의혹으로 다시 핵 문제의 중심에 섰다. 한미동맹도 잇달아 진보 정부가 출범하며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다.

    

토머스 허버드 주한미대사와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이 2002년 11월27일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고를 일으킨 두 미군 병사가 무죄 판결을 받은 즉시 출국하고, 부시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지 않는 형태의 '대리 사과'는 대선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역풍을 불러 일으켰고, 좌파는 이를 대선에 적극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2002년 6월13일 경기도 양주에서 발생한 효순·미선 사건이다. 훈련 중이던 미군 제2사단 소속 장갑차가 좁은 도로를 지나던 중학생 신효순·심미선 양을 치어 숨지게 했다. 어떤 이유로도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었다. 주한미군이 캠프 외부에서 훈련할 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함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고 직후의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못했다. 한국 사회 전체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거리마다 붉은 악마의 응원 물결이 이어졌고, 국민들의 관심은 축구대표팀의 선전에 집중됐다. 어린 여학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은 즉각 보도됐지만, 곧바로 대규모 반미 시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법적인 문제로만 생각한 미국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이 이 사건을 가볍게 다룬 것은 아니다. 허바드 대사는 사고 직후 여러 차례 유감을 표명했다.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허바드 대사와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은 사고 자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법적 절차에 따라 처리하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미군 병사들이 훈련 중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한미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에 따라 미국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사고를 낸 운전병과 관제병의 신병을 한국 측에 넘기지 않았다. 미국 입장에서는 협정에 따른 절차였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은 이를 한국의 사법 주권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2002년 7월3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효순 미선양의 49재 추모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영정을 들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은 전세계 50여 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만큼 전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사건이 한국 정치와 사회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는 예상했어야 했다. 미국은 법적인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데, 한국은 ‘리걸 마인드’(legal mind)가 여전히 약한 나라다. 법적인 사과를 해도 진정성이 있느냐고 묻는 문화가 여전하다.

 

미국은 이 사건 10년 전인 1992년 발생한 윤금이 사건을 염두에 뒀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1992년 10월 경기도 동두천에서 기지촌 여성 윤금이 씨가 주한미군 병사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 이병 케네스 리 마클은 범행 후 검거됐는데, 당시 이 사건의 참혹한 범행 수법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윤금이 사건은 주한미군 범죄와 SOFA 개정 필요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시민단체와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미군 범죄에 대한 엄정한 처벌과 SOFA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바 있다. 2002년 효순 미선 사건 당시 한미 양국 정부 관계자들은 이 사건이 16대 대선 국면에서 정치적 이슈가 될 가능성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대선 직전 나온 ‘무죄 판결’

 

2002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노무현 캠프와 좌파 진영은 두 여중생의 죽음을 둘러싼 국민적 슬픔과 분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의 결정적 순간은 2002년 11월에 찾아 왔다. 주한미군 군사법원은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에게 잇달아 무죄를 선고했다.

 

주한미군 7명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무죄 평결을 내림에 따라 나온 조치였다. 그리고 이들은 즉각 출국했다. 미국으로서는 공무 수행과 관련한 법률적 판단이었지만 한국 사회에는 전혀 다른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두 여중생이 죽었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급속히 퍼졌다.

 

광화문을 비롯한 서울 도심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생과 시민단체 중심이던 집회는 점차 전국으로 확산됐고, 반미 시위는 12월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허바드 대사는 뒤늦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이 사건 10년 후인 2012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인과 미국인이 ‘사과’를 수용하는 틀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나도 백악관도 잘 몰랐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 법적 처벌을 받거나 사퇴하면서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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